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또 꺼내게 되는군요... 몇년 전 학부생이던 저는 어느 시골 대학에 문사철 대학원생들을 감금하고 비평이론에 푹 절이는 기숙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번역이론 세미나에서 어느 학생이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 “번역자의 과제” 발제에 지원했지요. 이 에세이에서 벤야민은 순수언어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문언의 어의를 표현, 파악함에 있어 ‘의도된 것’과 ‘의도의 방식’을 구별하면서, 예컨대 빵을 뜻하는 독일어 Brot과 프랑스어 pain은 같은 것을 의도하는 (빵) 동시에 그 의도의 방식의 차이로 말미암아 다른 함의(독일인에게 있어 Brot과 프랑스인에게 있어 pain은 동질하지 않다)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세미나에서는 해리 존이 번역한 영역본을 이용했어요. 이 판본에는 bread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Brot과 pain의 ‘의도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안 나온다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발제를 맡은 미국인 친구는 독일어도 프랑스어도 몰랐는지, 외국어임을 나타내기 위해 기울임체로 적힌 pain을 고통을 뜻하는 영단어 pain으로 이해하고, Brot은 또 무슨 이유에선지 빵을 뜻하는 독일어로 옳게 이해하고, 이것을 전제로 20분짜리 발표를 하였습니다. (같은 문단에 “pain이 프랑스인에게 뜻하는 바와 Brot이 독일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같지 않다”는 문장도 나오는데 왜 pain을 영어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빵과 고통이 등치될 수 있다니... 빵과 고통이라는 단어의 의도된 것이 같다니! 이 친구는 이를 주제로 장장 10여 분에 걸쳐 벤야민의 심오한 어쩌고... 일용할 양식과 고통의 관계와... 막 창세기도 언급되고... 철학적인 논의를 펼쳤습니다. 차라리 Brot을 고통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라고 생각했더라면, 의도된 것의 자리에서 빵을 빼고 고통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원래 벤야민의 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해석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같은 대상을 의도하는 서로 다른 언어의 두 단어의 동질성과 이질성 사이의 긴장에서 번역의 실마리가 피어난다 뭐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예를 서로 다른 대상을 의도하는 서로 다른 언어의 두 단어로 바꿔서 해석하니 뭔가 먹는 것은 곧 고통이고 빵은 생명의 대유이고 하이데거가 어쩌고 삶은 계란 같은...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얼어붙었고 다른 학생들도 그랬습니다... 발제가 너무 길었고 잔인하게도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상대성 이론이란 이런 것인가 싶었고... 너무 땀이 나고 제가 다 민망해서 웃을 수도 없었습니다. 발제가 끝나고 세미나 담당 교수는 완벽한 포커페이스, 아주 우아하고 정중하고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빵은 빵임을 알려주었고... 저는 그 교양있는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빵은 고통이 아니고 빵이 빵이라는 핵심적인 사실 단 한 가지만 제외한다면 빵과 고통의 관계에 관한 그 학생의 발제도 철학적 깊이가 얕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물론 아주 창피했겠지만 그 후에도 3주일 동안 평일 매일 여섯시간씩 진행되는 세미나에 꿋꿋이 출석해 적극적으로 토론에 기여한 발제자의 근성에도, 그건 도무지 저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번역자의 과제는 상당한 고전이라서 아무 서양어문학과 가면 졸업하기 전에는 한 번쯤 읽습니다. 세 번 네 번 읽기도 합니다. 그런 텍스트에 대해서, 글줄을 잘못 해석한 것도 아니고 거기 등장하는 외국어 (그것도 빵) 가 외국어임을 캐치하지 못해서, 너무나 치명적인 오독을 베이스로 너무나 긴 시간 동안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그... 그리고 준비해 온 말을 다 할 기회를 일단 주었다가 진정 성숙한 태도로 그를 지적한 교수님... 그 상황을 어른스럽게 넘긴 발제자와 동료들... 그리고 번역의 어려움에 대한 글에 대해 발표하며 지성사에 길이 남을 오역을 해 버린 그 상황의 드라마, 아이러니, 온도, 습도... 그 아름다움. 저의 인생을 윤리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지도하는 마법의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